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(문단 편집) === 황금기와 위기: 1990~2003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kjclub.com/23.jpg]]}}}|| || 1990년 대통령배 우승 || 다행히 학교법인 [[충암학원]]은[* 다만 이 학교 재단은 상상 이상으로'''[[http://m.news.naver.com/memoRankingRead.nhn?oid=021&aid=0002252728&sid1=102&date=20151006&ntype=MEMORANKING&backUrl=%2FmemoRankingList.nhn%3Fsid1%3D102%26date%3D20151006|막장인것 같다.]]''' 법정 공방이 오가고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등 정상화 과정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.]은 산하 초등학교부터 야구부를 일구기 시작했고, 그 멤버들이 무럭무럭 자라 고교생이 되는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체 수급한 선수들로 전국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. 그 결실은 1988년 투수 공의식과 당대 고교 최고의 유격수 [[류지현(야구)|류지현]]이 등장하여 봉황대기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, 1990년에는 [[심재학]]-[[이원식(야구)|이원식]]-송재용 3인방에 2학년 포수 [[최기문]]을 앞세워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석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. 그리고 1995년에는 [[OB 베어스 항명파동]] 당시 모교에서 훈련하던 [[장호연]]에게 슬라이더를 배운 [[박명환]]의 각성을 앞세워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하면서 준수한 명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. 그러나 감독 선임을 둘러싸고 충암고 재단과 학부모 간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2000년 말 급기야 대거 전학생이 발생하는 사태가 빚어지며 선수가 단 4명만 남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.[* 해임당한 곽성열 감독(고교 선수들의 미국 진출을 돕는 브로커 노릇을 한 게 해임 사유였지만)을 따라 다수의 선수들이 새로 창단한 한광고등학교 야구부로 옮겼고 여기에 다른 팀에서 몇몇 선수들이 추가로 합류했다. 그러나 한광고 야구부는 창단 2년도 안 되어 해체되었고 선수들은 다시 흩어졌으며 곽성열 감독은 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.] 거의 해체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충암고 야구부는 졸지에 약체로 전락했고,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충암고 출신 선수들은 그 양과 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프로 배출 선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에 이른다. 이 당시 충암의 전통적인 유니폼(회색 상하의+적색 언더셔츠)를 버리고 변경된 유니폼을 착용하기도 했다.[[https://www.donga.com/news/article/all/20020520/7821217/1|당시 유니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